12:01 AM Feb. 28, 2013

아내가 세상을 떠난지 10개월이 되어 간다. 그러나 아내가 상태가 악화되어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하게 된 것은 훨씬 전이었다. 정신적으로 아내가 내 곁에 더 이상 있지 않았던 것으로 따지면 거의 2년전이 된다. 실질적으로 홀아비 생활을 한지 2년이 되어간다는 얘기다. 정신의학적으로 스트레스를 매길 때 가장 높은 것이 배우자의 사망이라고 한다. 홀아비는 같은 연배의 기혼남보다 배우자 사망후 6개월 동안에 사망율이 60%가 높다고 한다. 이런 통계는 상실감, 일상 생활의 어려움 등을 원인으로 돌리고 있다.
나의 정신을 나날이 갉아먹는 가장 큰 느낌은 가장 가깝던 사람이 갑자기 이 세상에서 존재가 지워져버린 것에 대해 느끼는 공허감, 허무함이다. 사후 세계에서 개별적인 의식이 유지된다는 주장은 개연성이 있지만, 나는 그것을 체험하지 못했다. 이 세상에 내가 묶여 있는 한 내가 매일 반복해서 느끼는 것은 한 인간의 존재가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사라져버렸다는 사실 뿐이다. 내가 만질 수 있고, 이야기하고, 바라 볼 수 있었던 한 인간이 지워져버렸다는 것. 그리고 세상은 그런 것과 상관없이 여전히 돌아가고 있다는 것.
내가 이 육체에서 벗어나서 다른 차원을 볼 수 없는 한, 아내의 죽음은 허무한 종말일 뿐이다. 아무도 아내를 기억하지 않는다. 심지어 나의 머리 속에서도 아내의 기억은 날이 갈수록 희미해져 간다. 죽은 정승보다 살아있는 개가 낫다는 속담은 비속하지만 죽음과 삶에 대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인간들이 본능적으로 갖는 느낌을 정확히 표현한다. 천국을 믿는 예수교도들 조차 그렇게 좋은 천국에 빨리 가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죽음을 넘어서는 그 무엇도 이 세상에는 없다. 한 인간이 남긴 업적, 후손, 기억. 그런 모든 것들도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에 의존한다. 그리고 그 인간들도 죽고, 잊혀진다. 한 인간의 죽음은 하나의 세상의 종말이다. 인간은 타자의 죽음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고, 위로하고, 기억하고, 갖가지 정당화를 할 수 있지만, 막상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내 경우에는 아내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 고속도로에 널부러진 개의 죽음과 그럴듯한 장례식을 갖추고 매장되는 인간의 죽음은 본질적으로는 같은 죽음이다. 허울좋은 의식을 벗겨내면 인간의 죽음은 개의 죽음과 똑같다. (카프카는 그래서 소설의 마지막에 죽어가는 주인공이 마지막 하는 말을 "마치 개처럼" 이라고 썼는지도 모르겠다. )
종교, 철학, 뉴에이지 신비주의 따위의 정당화에 의존하지 않고,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동물적이고, 인간적인 관점에서 죽음을 바라본다면 죽음은 그저 끔찍한 것이고 멀리 해야 하는 것. 모든 의미를 파괴하는 종말일 뿐이다. 미화되지 않는, 정당화 되지 않은 날 것으로서 죽음을 자신의 죽음이 올 때까지 끝없이 기억하고, 반추하는 것. 그것이 홀아비로서 내게 주어진 현실이다.
아내의 정신과 육체가 3년 동안 서서히 무너져가는 것을 본 나는 죽음을 슬로우모션 비디오로 끝없이 반복해서 보고 있다. 이 짓을 죽을 때까지 계속하는 것. 염세주의자가 되기에 이것보다 더 적합한 연습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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