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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posts from July, 2014

변화

나는 게으른 인간인데도 이렇게 살고 있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것은 아닌데. 결국은 관성의 법칙이다. 넓은 세상을 보는 것도 아니고, 이 어두운 사무실에 앉아 있다가, 차를 몰고, 저녁을 하고, 어두운 방에 앉아 있다가 잠을 자고, 다시 출근하고. 이런 짓을 반복하다가 나이가 더 들면 회사를 그만 두고, 어쩌다 보니 시간이 더 지나면 병들어 죽는 것이다. 인간들은 어떻게 이런 무의미한 반복을 견디는 것일까? 아마도 같은 반복이라도 그것을 같이 하는 누군가가 있으면 견딜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왜 나는, 같이할 사람도 옆에 없는데, 무엇이 두려워서 이런 무의미한 생활을 반복하고 있을까? 아들들 때문에? 그것이 아니다. 변화하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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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etimes when I play ukulele, the lamp stand flickers. I wonder if it is my wife sending me a signal. Maybe it is her. Maybe I just wish it is her. I am stuck in this life. I am lonely. I am fed up with people. I feel pathetic. I don't know what this is. What am I doing here? I want to leave this place. This job and this life. I want to forget about past 5 years. I want to forget about my life.

2014년 7월 28일

과거의 나를 생각했다. 출근하는 차안에서. 희선이 살아있을 때. 내가 젊었을 때. 과거의 나를 머리속에서 기억하고, 바라보면 마치 다른 인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과거에 그 장소에 그 상황에 내가 있었던 것도 신기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이 장소에 이런 상황에서 내가 앉아있는 것도 신기하다. 그림에서 등장인물 하나를 빼버리고 나니 완전히 다른 그림이 된 것처럼, 나의 일상적인 세계에서 희선이 없어지자 마자 이 세상은 전혀 다른 곳이 되었다. 나만의 게으른 세계에 빠져서, 멍하니 살던 나도 다른 인간이 되었다. 개선된 것도, 나빠진 것도 아니다. 나는 그저 다른 인간이 되었다. 세상이 달라졌고, 내가 달라졌다. 둘 다 낯선 존재다. 다른 나. 다른 세상. 빨리 끝나면 좋을 악몽같은 세상이라고 가끔 생각한다. 아무 것도 진지한 것은 없지만, 깊은 생각을 하고 싶지 않거나, 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인간들은 힘들게 사는 것이다. 나도 그랬고, 아내가 죽은 것을 보고 나서도, 한 사람의 죽음으로 세상이 완전히 달라지고, 내가 죽으면 그 달라진 세상이 아예 없어지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여전히 일상에 묶여있는 것이다. 집을 팔아버리고, 여행을 가도 되는데, 모험을 해도 되는데, 그렇게 안 하는 것이다. 결국은 관성의 법칙 때문이고, 게으름 때문이다. 지진이 나고, 화산이 터져서 살던 집이 박살이 났는데도, 모든 걸 털어버리고 길을 떠나는 대신에 쭈그려 앉아서 부서진 살림살이를 챙기고 있는 아줌마 같은 짓을 내가 하고 있는 것이다. 한심한 놈. 게으른 놈. 인간들의 게으름, 어리석음에 경멸을 보내고, 그 안에 속해있는 나 자신에게 똑같은 경멸을 보낸다. 하나의 죽음은 삶 전체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지를 깨닫게하는 증거다. 인간들은 다만 그것을 외면할 뿐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들

가끔 이메일을 교환하는, 미국 친구 Kim의 이메일을 받았다. 아버지가 죽었다고 한다. 희선의 죽음을 겪은 후 다른 인간들보다 내가 한 가지 잘하는 것은 죽음의 소식에 대해 놀라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내가 죽어서 모임에 자주 못나왔다고 말했을 때 놀라서 일그러지던 어느 회사의 여자 임원의 얼굴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나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듣고 일그러지는 그 여자의 얼굴을 보고 놀랐다. 인간들은 정말로 죽음을 무서워한다. 곰곰 생각해보면 희한한 일이다. 인생이라는 여행의 종착역이 죽음인데, 그 종점에 도착한 다른 인간을 보고 놀라는 것이다. 자기는 마치 그곳에 가지 않을 것 처럼. 낮에 찾아간, 희선의 재가 남아 있는, 메모리얼 파크에서 벽에 붙은 사진을 보고 큰 소리로 우는 젊은 여자를 보았다. 옆에 나이 든 남자가 있는 걸로 봐서는 어머니가 죽은 모양이다. 아무리 소리내서 울어도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희선이 간 후 거의 울지도 않았다.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돌릴 수 없는 그 비참한 죽음에 대해서 허탈함, 분노, 허무함,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지만 소리내어 울게 되지는 않았다. 울어 봤자 소용 없다는 깨달음 때문인가. 아니면 3년이 넘게 아내의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서 적응이 되었기 때문인가.

시간과 공간

시간, 공간.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인간들이 주변에 있다. 밤에 전화를 걸어, 나에게 이것 저것을 하라고 충고한다. 그 인간들은 미래의 계획을 머리 속에 가지고 있다. 나는 그런 계획이 없다. 나는 우주비행사처럼 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이 세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인간들을 나는 바라본다. 나는 정말로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직도 삶에서 보람을 느끼는 인간들, 안온한 현실에서 하찮은 일상을 되풀이하며 만족을 느끼는 인간들을 생각하면 부럽다.

2014년 7월 18일

2014년 7월 18일 오후 2시 30분 나는 혼자 사는 것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대화 상대가 없고, 밤에 한 이불을 덮고 체온을 나눌 여자가 없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점점 혼자 사는 것에 익숙해진다. 아이들이 커 갈수록 현실이 나의 목에 걸고 있는 밧줄도 점점 느슨해진다. 회사에서 하루 9시간씩 앉아 있어야 하는 생활에서도 결국은 탈출하게 될 것이다. 매일 출근 하는 자가용 안에서 인간들을 바라 본다. 짧은 치마를 입은 젊은 여자들을 본다. 추하게 생긴 외국 여행객들을 본다. 오직 이 인생만이 전부이며, 죽고나면 아무 것도 없다는 뉴튼의 물리학, 기계적 세계관을 종교처럼 믿고 있는 인간들을 본다. 뉴튼을 읽은 적이 없고, 아인슈타인을 읽은 적이 없다는 점에서 그들과 나는 다른 점이 없다. 다만 인간들은 9시 뉴스를 믿듯이 학교에서 배운, 남이 토한 지식을 기준으로 자신들이 발을 딛고 사는 세계를 상상하고 믿는다는 것. 나는 매일 뉴스에서 반복되고, 인간들이 암묵적으로 확인한다고 해서, 낡은 우주의 해석이 사실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것.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인간들이 만들어낸 원시적인 측정도구에 잡히지 않는다고 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의 실체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그들과 나의 차이점이다. 학교에 가기 싫어서 지구가 멸망하면 좋겠다고 말하는 둘째 아들처럼, 나도 사무실 옆사람에게 핵폭탄이 터져서 다 죽어버리면 좋겠다고 공공연히 말한다. 그는 내가 진심을 말한다는 것을 모른다.

목요일 오후

내가 희선과 보낸 시간들. 내가 희선과 만들었던 경험들. 그 모든 것을 다시 만들어낼 수는 없다. 희선에 대해서 생각하는 빈도가 줄어든다. 절실히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내 인생의 패턴이었다. 이제 희선의 죽음에 대한 기억이 나를 잔인하게 후벼파는 힘이 줄어들었으니, 오히려 꿈 속에서 희선을 다시 만날 가능성이 커지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가진다. 멀리 여행을 가서, 스위스로 출장을 가서, 희선과 떨어져 있었지만, 서울에 희선이 있다는 생각이 머리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던 매년 6월의 해외출장. 그때처럼 지금은 희선이 멀리 출장을 갔다고, 나는 잠시만 있으면 다시 희선을 만난다는 그런 자기암시를 해도 될 것이다. 눈깜짝할 사이에 흘러버린 희선과의 19년처럼, 나의 앞으로의 19년도 금방 지나갈 것이다. 인생에 FF 버튼이 있다면 반복해서 눌러서 시간을 빨리 감고 싶다. 모든 것이 끝나도록.

일요일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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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자고 혼자 일어난다. 언제 끝이 날 것인가.

시간의 힘

시간이 흐르니까 기억이 희미해지고, 과거의 고통에 대한 느낌도 약해진다. 희선이 혼자 방에 앉아 있는 사진, 병원에서 넋이 빠져 누워있는 사진. 이런 사진들을 멀리하면 괴로운 감정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시간의 힘은 강력하다. 모든 감정과 기억을, 인간 자체를 지워버린다. 결국에는 나도 지워질 것이다.

목요일

나는 진공상태와 비슷한 세계에서 살고 있다. 나에게 익숙했던 과거는 희선이 병들고, 죽은 후부터는 사라져 버렸다. 나의 미래는 알 수 없지만, 희미하게 예상할 수 있는 나의 만년은 혼자 살다가 죽는 노인의 모습이다. 어떤 여자가 다시 나의 인생에 들어올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정상적인 여성을 유인할 수 있는 요소가 내게는 없다. 젊음, 미래, 돈. 그러나 친구에게서 들었던 한 남자의 이야기는 신기하다. 나도 한번 흘낏 본 그 남자는 돈도 없고, 나이도 나보다 많다. 특출한 외모도 아니다. 그러나 돈이 많은 노처녀가 반해서, 같이 살고 있다. 금전적 문제와 외로움이 해결된 것이다. 왜 나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왜 나는 혼자 살다가 죽을 것이라고 예감하는 것일까? 결국은 운명에 대한 예감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되돌아보면 희선이 먼저 죽을 것이라는 전조 같아 보이는 일들이 과거에 있었던 것처럼. 지금 이 시간에서 컴컴한 미래를 바라 볼 때도 나는 비슷한 예감을 느끼는 것이다.

나의 인생은 Story가 될 수 없다.

"한 개인이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고, 그것을 얻기 위해 여러가지 장애를 극복하고, 마침내 원하는 바를 얻는다." 이것이 유명한 시나리오 작법 강사 Robert Mckee가 내린 Story의 정의다. 나의 인생, 희선을 살리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한 나의 인생이 왜 이야기가 될 수 없는지, 다른 인간들과 공유할 만한 가치가 없는지 이제는 안다. 나는 장애를 극복하지 못했고, 원하는 것을, 희선을 살리는 것에 성공하지 못했다. 지난 5년간의 나의 인생은 실패였다. 그러니 내가 삶에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나 자신에게 여러 번 되풀이해서 말해준다. "나의 인생은 실패다." "나는 실패했다." 여러가지 방도를 찾아가면서 아내를 살리려고 고생했지만, 암에 걸려 고통받다가, 비참하게 죽어가는 아내를 결국 살리지 못했다. 이건 이야기가 아니다. 이건 나 자신과도 나누고 싶지 않은 한심한 시나리오다. 나의 인생은 실패라는 것을 기억할 것. 그리고 그 기억에서 자포자기와 편안함이 뒤섞인 만족을 느낄 것. 욕심을 내지 말 것. 그저 눈을 감고 시간이 흘러가도록 내버려 둘 것. 인간들과 섞이려고 노력하지 말 것. 아무 것도 희망하지 말 것.

일요일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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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 to forget her

I have been to Heesun's cemetery a couple of days ago. I think less and less about her now. I need to remind myself to remember her. I don't want to forget her. I need to remember her to live. To go on liv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