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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posts from August, 2014

I cannot change the past

What has been done is irreparable. No matter how or what I do, I can change nothing what is in the past. My wife died and I am a widower. Sooner or later, I will die, too. Everything that happened and will happen to me is in the single package called my life.  I know nothing that is certain.  I don’t have to fight over anything. Fight to get anything. Life just goes on until I die.  I just let myself to this stream called life. I just stay for a while and I am gone.  Nothing is serious enough for me to fume about.  Nothing is a cause for complaint or anger or even interest.  I just let myself be and let things around me be. 

길잃은 영혼

생각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 Law of attraction. 그리고 수많은 뉴에이지 서적들. 그런 책들을 읽으면 나는 지금의 상태에 이르게 된 것에 대해 나 말고는 아무도 책망할 인간이 없다. 아내가 병에 걸렸을 때, 갖가지 방법을 써서 아내를 살리려고 했지만, 그때 내가 적은 일기를 보면 아내의 죽음을 항상 두려워하고 있었다. 내가 두려워 하는 것이 현실이 된 것이다. 내가 아내를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병을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나는 정말로 아내를 살릴 수 있었을까?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현실은 내가 만들어 낸 것인가? 나의 모든 환경, 모든 사건들이 내가 이미 써놓은 시나리오인가? 나는 그저 쓰여진 각본대로 연기를 하는 배우인가? 과거에 나는 기계적인 결정론을 믿었다. 자유의지에 대해서 불신을 품고 있었다. 아내가 암에 걸렸을 때, 나는 나 자신의 의지를 채찍질하면서, 나약한 육체를 혹사시키면서 아내의 죽음이라는 정해진 코스를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아내가 가버린 후, 나는 과거에 믿었던 결정론보다 더 철저한 또 다른 종류의 결정론에 빠져버린 것 같다. 나의 사주에는 홀아비가 될 팔자라고 써 있었다. 영혼에 관한 책들에서는 인생에서 내가 겪는 커다란 사건들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계획한 이벤트, 영혼의 발전을 꾀하기 위한 장애물이라는 설명을 공통적으로 하고 있다. 이렇게든 저렇게든 나는 이 세계에 갇혀 버린 셈이다. 어쩌면 나는 직감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기억할 수 있는 유년시절을 돌이켜 보면, 인생에 대해서 내가 느낌 감정은 대부분 인생은 지긋지긋한 것, 뭔가 발을 잘못 들여놓은 장소라는 것, 아둥바둥하고 살려고들 애쓰지만 결론은 허무하고 비참한 것이라는 것. 그런 감정들이었다. 유치원에 다닐 때도 그랬고, 그 이후의 유년시절에도 마찬가지 감정이었다.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었다. 영화를 보기도 전에 왠지 기분이 께름찍한 영화를 볼 것 같다는 느낌 같은 것이었다. 으슥한 어두운 골목처럼

문을 닫는 것이 살 길이다.

인간들과 만날수록, 세상으로 나갈수록 나는 더 피곤해지고, 자신을 잃는다.  건강, 침착함, 평온한 생각, 명상. 모든 것이 내가 혼자서 사는 법을 터득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세상은 나에게 줄 것이 없고, 나도 세상에 줄 것이 없다.  모든 불행은 집 밖으로 나가기 때문에 생긴다는 빠스깔의 말은 항상 옳다.  자신의 정원을 가꾸는데 전념해야 한다는 볼테르의 말도 항상 옳다.  인간들을 만나는 것은, 세상과 섞이려 하는 것은 나를 잃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

희선을 기억하는 건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는 받을 수 없는 퇴근 시간 가까이에 희선이 보내는 메시지. 나의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부재를 기억하는 것이다.  소중하다는 것을 몰랐던, 과거의 나의 한심함에 대한 생각. 죽을 때까지 혼자일 거라는 미래에 대한 생각. 인생의 의미 자체에 대한 회의. 나의 염세주의라는 파도를 막아주는 방파제 같은 존재가 희선이었는데, 아들 둘도 다 커서 독립을 하면, 나는 나의 생존을 무엇으로 정당화시킬 것인가? 한순간에 파도에 휩쓸려갈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잘난체해도 고독을 이겨낼 수는 없다. 고독을 잠시 잊을 수는 있겠지만. 다른 일에 몰두함으로써. 결국에는 혼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절망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삶의 정당화라는 것이 나에게는 중요한 이유다. 

월요일 아침

      아들들이 성인이 되기 전에 내가 죽지 않는다면, 그래서 가사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 열릴 것이다. 그때가 되면 죽음을 앞당길 수도 있고, 다른 나라를 보러 갈 수도 있다. 지금은 세상이란 것 자체에 정이 떨어졌지만, 그때가 되면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때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희선에게 그런 일이 벌어진 것처럼. 무슨 상관인가.

월요일 아침

      아들들이 성인이 되기 전에 내가 죽지 않는다면, 그래서 가사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 열릴 것이다. 그때가 되면 죽음을 앞당길 수도 있고, 다른 나라를 보러 갈 수도 있다. 지금은 세상이란 것 자체에 정이 떨어졌지만, 그때가 되면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때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희선에게 그런 일이 벌어진 것처럼. 무슨 상관인가.

일요일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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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꿈을 꾸었다. 그러나 희선은 꿈속에 나타나지 않았다. 거실에 걸린 희선의 웃는 사진을 잠시 보았다.

금요일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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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가 지나갔다. 내 방 정리 하고, 집안 전체 빗자루질 하고 나니 하루가 지나갔다. 하루가 지나갔다.

아무 것도 할 필요 없다.

나의 생존을 지루하게 느낀다. 인간들이 어떻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로빈 윌리암스가 자살했다. 총명한 인간들은 삶을 견디지 못하는가 보다.

Get used to reality

Will anyone live my life instead of me? Nobody does it. But then again, I don’t have to care about anybody. I will live my life and die my death. There will be no other woman in my life until I die. This is not a determination. This is an objective observation and prospect. If a woman comes into my life in spite of my financial situation and my characteristics, she must be an angel. And I already met a woman like that and she died. There is no chance a thing like that repeats itself. Not a chance. So, get used to reality and just live your life without any hint of expectation. Just shut up and live and eventually die.

고통의 의미

말을 못하고, 정신이 망가지고, 남은 것은 껍데기 밖에 없었던 희선의 마지막 날들. 그 고통을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설명하기 위해서 나는 책을 여러 권 읽었다. 그런 괴로운 경험이 나의 발전을 위해서 필요했다는 식의 합리화가 필요했다. 고통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 이 모든 일들이 내가 원한 것이었다는, 내가 이미 계획한 것이었다는 식의 설명. 그러나 고통에 대해서 근본적인 질문을 할 필요가 있다. 고통스런 경험은 정말로 인간을 더 나은 존재로 변화시키는가? 그런 경험이 없는 편안하고 행복한 인생이 잘못된 것인가? 결국은 구차한 느낌이 든다. 다리가 잘린 인간이 불구가 되어서 좋은 점을 나열하는 것과 비슷한 짓이다. 내게 일어난 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내가 애쓰는 것은 말이다. 희선은 말도 못하고, 침대에 누워서, 아무도 못 알아보고, 똥오줌을 기저귀에 싸면서, 거의 1년을 병원에서 보내다가 죽었다. 거기에서 무슨 의미를 찾아내려고 애쓰는가? 자신을 속이지 마라. 길가는 아무나 붙잡고, 그런 상태가 되고 싶냐고 물어보면, 그렇게 하면, 남편을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하면 그러겠다고 하는 인간이 있을까? 물론 미친 질문이다. 희선이 비참하게 죽은 것은 신하고도 상관이 없다. 상관이 있다면, 그런 존재는 신이 아니라 악마라고 불러야 한다. 왜나면 그런 고통과 신은 내가 생각하기에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잠자리의 날개를 하나씩 뜯으면서, “이렇게 하면 훌륭한 잠자리가 될 수 있다”라고 말하는 신을 상상할 수 있는가? 고통은 고통일 뿐이다.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정신착란이다 과거에 했던 어떠한 결정도, 미래에 일어날 어떤 일도 현재의 고통을 정당화하거나, 고통 이상의 그 무엇으로 바꿀 수는 없다. 고통은 고통이고, 죽음은 죽음이며, 남은 인간은 그저 혼자 남은 인간일 뿐이다. 고속도로에서 차에 치어 죽은 개의 옆을 떠나지 못하는 다른 개와, 나의 신세는 다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