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의미
말을 못하고, 정신이 망가지고, 남은 것은 껍데기 밖에 없었던 희선의 마지막 날들.
그 고통을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설명하기 위해서 나는 책을 여러 권 읽었다. 그런 괴로운 경험이 나의 발전을 위해서 필요했다는 식의 합리화가 필요했다.
고통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 이 모든 일들이 내가 원한 것이었다는, 내가 이미 계획한 것이었다는 식의 설명.
그러나 고통에 대해서 근본적인 질문을 할 필요가 있다. 고통스런 경험은 정말로 인간을 더 나은 존재로 변화시키는가? 그런 경험이 없는 편안하고 행복한 인생이 잘못된 것인가?
결국은 구차한 느낌이 든다. 다리가 잘린 인간이 불구가 되어서 좋은 점을 나열하는 것과 비슷한 짓이다. 내게 일어난 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내가 애쓰는 것은 말이다.
희선은 말도 못하고, 침대에 누워서, 아무도 못 알아보고, 똥오줌을 기저귀에 싸면서, 거의 1년을 병원에서 보내다가 죽었다. 거기에서 무슨 의미를 찾아내려고 애쓰는가? 자신을 속이지 마라.
길가는 아무나 붙잡고, 그런 상태가 되고 싶냐고 물어보면, 그렇게 하면, 남편을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 수 있다고 하면 그러겠다고 하는 인간이 있을까? 물론 미친 질문이다.
희선이 비참하게 죽은 것은 신하고도 상관이 없다. 상관이 있다면, 그런 존재는 신이 아니라 악마라고 불러야 한다. 왜나면 그런 고통과 신은 내가 생각하기에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잠자리의 날개를 하나씩 뜯으면서, “이렇게 하면 훌륭한 잠자리가 될 수 있다”라고 말하는 신을 상상할 수 있는가? 고통은 고통일 뿐이다.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정신착란이다
과거에 했던 어떠한 결정도, 미래에 일어날 어떤 일도 현재의 고통을 정당화하거나, 고통 이상의 그 무엇으로 바꿀 수는 없다. 고통은 고통이고, 죽음은 죽음이며, 남은 인간은 그저 혼자 남은 인간일 뿐이다. 고속도로에서 차에 치어 죽은 개의 옆을 떠나지 못하는 다른 개와, 나의 신세는 다른 것이 없다. 살아남은 개, 살아남은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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