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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posts from 2012

시간

8년전, 9년전 쯤에 토요일. 회사에서 돌아오는 길. 차를 몰고 오면서 길을 잘 못 들어 한 번도 가지 않은 거리를 지나가고 있었고, 차안에는 Ronald Brautigam의 Mozart 소나타가 흐르고 있었다. 신선한 공기, 비에 젖은 거리. 상쾌한 기분. 생각난다.

홀아비를 위한 게임

MAY PAYNE 3를 플레이스테이션 3에서 한다. 마누라하고 딸이 죽은 전직 경찰. 매일 술만 퍼마시고 헛소리만 지껄이는 인간이 주인공이다. 총질을 하다가 힘이 딸리면 술을 마신다. 그러면 파워가 보충된다. 홀아비가 하기에는 동병상련이 느껴지는 게임이다. 게임을 하면서 이런 느낌을 갖게 될 줄은 몰랐다. 비참한 캐릭터를 넣은 게임이 많이 나오면 좋겠다.

달라지는 건 없다.

아내가 가고난 후 나는 아내가 있을 때 병을 고치려고 갖가지 supplement와 의학 논문을 검색했던 것과 비슷한 짓을 했다. 이번에는 다른 차원의 세계와 영혼에 대한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아래 책들이다. destiny of souls journey of souls afterlife experiments talking to heaven frequency quantum reality the light beyond paranormal holographic universe life after life the fabric of the cosmos 이 세계는 홀로그램이라는 것,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 이런 양자물리학의 주장. 영혼은 사후에도 존재하고 사랑했던 사람과 접촉이 가능하다는 것. 이런 사후세계에 대한 여러 책들의 주장. 또는 연구 결과. 그러나 우주의 구조가 어떻든, 영혼이 환생하든, 살아있는 사람과 어떤 방법으로 접촉하든지 간에 따뜻한 살을 가지고 있는 육체로서의 아내는 내 옆에 없고 나는 혼자 남겨졌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믿음은 산을 옮길 수 없다. 애초부터 산이 없던 자리에 산의 허상을 만들어 낼 뿐이다. 현실이 유지된다면 믿음 자체가 불필요한 것이다.

운명

1990년 1월 2일 1990년 1월 2일이면 희선이 25살이었을 때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늦은 군 입대를 한지 6개월 정도 지났을 때였다. 지금은 없어진지 오래인 방위 그것도 동사무소가 아니라 현역들과 함께 군생활을 하고 밤에는 퇴근, 새벽 다섯시에 다시 부대로 들어가는 생활을 7개월째 하고 있던 때다. 피곤한 시절이었다. 운명이란 것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때의 희선과 나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었고 어쩌면 전혀 만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1991년말에 내가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1992년초에 국제협력단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비슷한 시기에 희선이 경제기획원에서 신생 조직인 국제협력단으로 옮기지 않았다면, 서로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희선이 나를 만나지 않고, 다른 남자를 만나서 다른 생활을 했다면, 암에 걸리지 않았을까? 오래 살았을까? 행복했을까? 알 수 없다. (다만 희선의 성격상 왠만한 남자를 만났다면 최소한 불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상사는 앞으로 바라보면 우연이지만 뒤로 돌아보면 운명이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어쩌면 미래라는 것도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신혼 초에 희선과 “세븐”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브래드 피트와 기네스 팰트로우가 부부로 나오는 영화였다. 희선은 영화가 시작한 지 5분도 안되어 나에게 말했다. ‘저 여자 죽을 것 같애’. 영화 처음 어디에도 그런 결말의 암시는 없었지만, 정말로 주인공의 아내는 마지막에 연쇄살인범에게 살해당한다. 영화를 보고 나서 왠지 기분이 안 좋았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찝찝한 기분이었다. 희선이 먼저 가는 것이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하긴 내가 아는 것은, 예감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예감도, 예리한 두뇌도 없었기에 지금의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일 수도 있다. 희선에게 꿈에라도 나타나라고 맘 속으로 여러 번 말했다. 드디어 어제 밤에 꿈 속에 희선이 나타났다. 그러나 흐릿한 기억 밖에 안나지만 아주 슬픈 꿈이었던 것 같다. 나

희선이 간 곳

1992.8.5 희선이 암에 걸렸을 때 내가 두려워한 것은 두 가지였다. 희선의 죽음에 대한 공포, 그리고 혼자 남게 될 나의 인생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두번째에 대해서는 그저 익숙해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첫번째에 대한 가장 큰 원인은 내가 죽음 이후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희선이 가기 며칠전 우연히 가사체험(near-death experience)에 대한 내용을 인터넷에서 보았다. 150 명 이상의 경험자를 대상으로 한 인터뷰에 기초한 내용이었다. 의학적으로 죽었다고 의사가 판단을 내리는 순간 그 사람들은 몸에서 빠져나오는 경험을 했다. 천장에 떠서 자신의 몸을 보고, 주변의 의료진, 가족들이 하는 말을 다 들을 수 있다.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거나 만지려고 하지만 불가능하다. 잠시후 검은 터널을 통과하고 밝은 빛을 본다.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너무나 환한 빛이다. 빛은 어떤 인격을 가진 것 같고 자신에게 부드럽게 말을 건다. 이때 그 사람은 형언할 수 없는 평온함과 행복을 느낀다. 잠시후 그 빛이 죽은 이에게 그의 인생 전체를 보여준다.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생생한 3차원의 모습이고, 짧은 순간이지만 자신이 살았던 인생의 모든 순간을 생생하게 보여준다고 한다. 특히 다른 사람에게 친절했던 순간, 그렇지 못했던 순간을 보여주는데 이때 그 빛은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순간도 배움의 일부라고 말한다고 한다. 과거를 보고 나면 어떤 경계선에 도달하게 되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광활한 풀밭, 어떤 사람에게는 강, 어떤 사람에게는 손잡이가 없는 문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이 단계에서 이미 세상을 떠난 가족들이 건너편에서 행복하면서 광채를 띤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다. 가사체험을 한 사람들은 모두 여기서 이미 죽은 가족이나 알지 못하는 힘에 의해서 다시 원래의 몸으로 돌려보내진다고 한다. 가사체험에 대한 연구는 1960년에 시작되었는데, 이제는 연구가 많이 진척되어서 발견된 사례도
My wife heesun died on May 2nd, 2012 at 12:05 pm. My attempt to cure her of glioblastoma was a big fat failure. Or I might say, I had a success in prolonging her life up to 34 months with unsuccessful surgery, interrupted chemo and radiation and numerous supplements. But her quality of life during the last 20 months was so bad that I hesitate to call what we had a success.  Anyway, now is the time for me to move on just like my wife did. Since my wife died, I turned my focus on to different topics. They are near-death experience and quantum physics. I want to understand the reality behind what happened to us and what she would have from the moment she left me. One recent realization that I had is time may not flow and all the past moments simply exist forever as they were in the time-space continuum in the universe. That means I can still love my wife in the past because she still exists in the frozen "presents" that are scattered in the whole continuum.

희선과 친구들

장례식장에서 사람들은 항상 “애들은 어떤가”라는 질문을 했다. 나는 지난 2년간 엄마로서의 존재가 서서히 지워졌기 때문에 정신적인 타격이 크지 않다고 대답했다. 그건 나에게도 해당되는 것 같다. 희선이 떠난 지 9일이 지났는데 회사를 나가고 살림을 하다보면 어느덧 희선에 대한 생각은 배경으로 밀려가는 것을 느낀다. 희선을 완전히 잊는 일은 없겠지만 벽 구석에 걸린 사진처럼 희미한 존재가 되어버릴 것 같다. 친구는 휴대폰에 넣은 희선의 사진을 보고 나에게 왜 자신을 괴롭히냐고 하지만 그런 식으로 희선의 존재를 상기시키지 않으면 결국에는 먼지를 덮어쓰고 있는 사진처럼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생활은 기억보다 강하니까. 같은 날에 친구 넷이 놀러가서 찍은 것으로 보이는 이 사진들 속에 희선은 얼굴에 애띠가 채 가시지 않은 모습이다. 몇살일까?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얼마안된 후라면 열아홉? 스물? 나이들어 찍은 사진에서 보이는 미소가 없는 걸 보면 커다란 세상에 발을 디딘지 얼마 안된 사회초년생의 불안감이 보이는 표정같기도 하다. 그러고보면 활짝 웃고 있는 사람이 없다. 소녀에서 처녀가 되기 전의 불안한 모습들인가. 희선이 입고 있는 옷과 구두는 산지 얼마 안된 것으로 보인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장만한 몇 안되는 의상 중 하나일 것이다. 청바지와 운동화가 아직은 더 어울리는데 정장을 입어야할 시기가 너무 빨리 온 것인가? 이 사진은 희선이 나를 만나기전까지 8년 정도의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할 무렵일 것 같다. 이 글을 다 쓰고나서 희선이 사진 뒤에 적어놓은 날짜를 발견했다. “1988.10.9 창경궁”. 스물세살 적의 사진이었다. 나의 어줍잖은 추측과 달리 회사생활을 한지 적어도 3년은 되었을 때의 사진이라는 얘기다. 나의 추측은 다 틀렸지만 여전히 이 사진속의 희선은 처녀보다는 소녀처럼 보인다. 같은 시기의 나는 대학교 4학년이었지만,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골방속에서 일기만 적고 있는 소년과 다름 없었다. 좋은 가을 날 공휴일에 친구들과

홀아비의 주말

희선이 가지 않았더라면 인생의 지금 이 시기부터 내가 희선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거라 생각된다. 애들은 토요일에도 이제 나하고 보내는 시간보다는 친구하고 보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난다. 지호는 자기 방에서 친구와 함께 기타를 치고 있고, 승호는 친구들과 PC방에 있다. 시력검사를 하기 위해 1시까지 병원에 데려가려고 했지만 둘다 싫다고 해서 실갱이를 하다가 결국에는 다음 주에 가기로 했다. 1999 희선이 있었더라면 주말에는 둘만의 시간이 많아졌을 것이다. 희선과 나, 둘 다 더 이상 애들이 매달리지 않는 늙다리가 되어버렸겠지만 둘이 있었다면 외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는 나만 남았다. 이미 사춘기에 들어선 때부터 애들이 나보다는 친구를, 바깥 세상을 더 좋아하는데, 성인이 되어 자기 짝을, 더 많은 친구를,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 나는 그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이게 나에게 남은 숙제다.

희선이 쉬는 곳에 다녀왔다.

애들 학교 보낸 후 이발하고, 지난 번 묘지에 갔을 때 제대로 못한 마무리를 하기 위해 시트지를 사서 분당메모리얼 파크로 출발했다. 지난 번에 갔을 때 사진을 검은 테이프로 붙였더니 지호가 다른 묘와 비교해서 제일 후졌다고 하는 말이 맘에 걸렸다. 이런 모양이다. 30분 정도 작업을 해서 검정테이프를 투명 시트지로 교체했다. 작업 중에 어느 할머니가 와서 자기 네는 왜 안해주냐고 항의한다. 나를 직원으로 착각한 것이다. 직원이 아니라 남편이라고 하니까 자기는 70에 과부가 되어도 괴로운데 얼마나 괴롭냐고 한다. 위로인지 속을 더 끓게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옆에 와서 사진 위치를 중앙으로 바꾸라고 여러 번 훈수를 둔다. 내 팔에 침을 여러번 튀기면서. 그래서 위치를 중앙으로 바꾸었다. 수요일은 분리수거일. 박스에 넣어두었던 희선의 옷을 하나씩 꺼내어 주머니에 뭐가 있는지 보았다. 아무 것도 없다. 허긴 여자들은 옷주머니에 뭘 넣지 않는 법이니까. 스커프를 꺼내어 냄새를 맡아보았다. 희선의 체취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겨울 스커프와 여름 스커프 하나씩 골라내어 따로 챙겨두었다. 연애할 때 입고 나온 것 같은 옷도 보인다. 그러나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확신할 수 없다. 좋은 옷이 없다. 미안한 마음이 든다. 다섯박스에 희선의 옷이 다 들어갔다. 내일이면 세상으로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2012년 5월 2일 오후 12시 5분 아내는 편하게 갔다. 수치가 낮아지면서 호흡이 힘들었지만 5분도 안되어 갔다. 아마 신이 있다면 차마 내 아내의 마지막 자리에서까지 잔인한 장난을 치고 싶지는 않아서였을 것이다.

Memory

I married Heesun on January 27th, 1996. She died in 2012. Therefore, we lived as a husband and a wife for 16 years. I began to go out with Heesun in 1993, which means we have been together for nearly 19 years. During the period that lasted almost 20 years, we never had a fight. Not even once. I would not describe our married life as a passionate experience but we really got along well with each other. And we talked a lot about mundane matters of our shared life. Now she’s gone, I find it weird that I know nothing much about Heesun’s childhood although we had lots of conversation. Once, she told me that when she was a little child, she had felt envious of other kids who had fathers to take them to amusement parks. Other than that, she never shared her childhood memory with me. The first time, Heesun and I shared each other's past memory was when we went on a summer trip in the summer of 1993. Sitting on a night beach, we talked about how we had lived before. I told her about my

I learned how to smile too l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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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cannot find a photo taken during our honeymoon trip except this one. I must have hated taking photos so bad. But the real problem with the photo is that I cannot give a big smile when I had my wife by my side after a long and difficult struggle to marry her. I just did not know how to smile. However, Heesun, who had more difficult times in her youth than I did, is almost always smiling in any photos I can find, although her smile was not as bright as before since I made a mess from 2002 by changing my jobs too often. It simply is difficult to find a photo where me and Heesun are showing a real big smile together. I finally found a photo that we, especially I, almost made it. But I seem to have learned how to smile too late. The photo was taken on May 14, 2011. Two months later, Heesun was hospitalized and soon had to use a feed tube for eating.  I am still looking for a photo in which I make a real big smile with Heesun in a good health.

Wife's last mess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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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nitive abilities of Heesun got worse and worse as the tumor invaded the brain stem. The first sign was when she put supplements that were kept outside the refrigerator into the fridge on September 26th, 2010. She forgot words and her language abilities began to slowly collapse. Eventually, it became impossible to have a normal conversation with her in October 2010. Since then, I communicated with her through fragmentary phrases until June 2011. Since August 2011, even that became impossible. What tormented me for the last 20 months was lack of improvement in Heesun’s condition in spite of repeated attempts with new supplements. But what made my heart sink even more was that I could not have meaningful conversations with my wife who is getting far away from this world. In my fight against the disease, she was beside me physically, but she was not able to be there for me mentally. Even on her deathbed, I did not hear a single word from her mouth. I was so occupied with the fight th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