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1990년 1월 2일
1990년 1월 2일이면 희선이 25살이었을 때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늦은 군 입대를 한지 6개월 정도 지났을 때였다. 지금은 없어진지 오래인 방위 그것도 동사무소가 아니라 현역들과 함께 군생활을 하고 밤에는 퇴근, 새벽 다섯시에 다시 부대로 들어가는 생활을 7개월째 하고 있던 때다. 피곤한 시절이었다.
운명이란 것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때의 희선과 나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었고 어쩌면 전혀 만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1991년말에 내가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1992년초에 국제협력단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비슷한 시기에 희선이 경제기획원에서 신생 조직인 국제협력단으로 옮기지 않았다면, 서로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희선이 나를 만나지 않고, 다른 남자를 만나서 다른 생활을 했다면, 암에 걸리지 않았을까? 오래 살았을까? 행복했을까? 알 수 없다. (다만 희선의 성격상 왠만한 남자를 만났다면 최소한 불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상사는 앞으로 바라보면 우연이지만 뒤로 돌아보면 운명이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어쩌면 미래라는 것도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신혼 초에 희선과 “세븐”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브래드 피트와 기네스 팰트로우가 부부로 나오는 영화였다. 희선은 영화가 시작한 지 5분도 안되어 나에게 말했다. ‘저 여자 죽을 것 같애’. 영화 처음 어디에도 그런 결말의 암시는 없었지만, 정말로 주인공의 아내는 마지막에 연쇄살인범에게 살해당한다. 영화를 보고 나서 왠지 기분이 안 좋았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찝찝한 기분이었다. 희선이 먼저 가는 것이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하긴 내가 아는 것은, 예감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예감도, 예리한 두뇌도 없었기에 지금의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일 수도 있다.
희선에게 꿈에라도 나타나라고 맘 속으로 여러 번 말했다. 드디어 어제 밤에 꿈 속에 희선이 나타났다. 그러나 흐릿한 기억 밖에 안나지만 아주 슬픈 꿈이었던 것 같다. 나는 희선과 행복한 재회를 하는 꿈을 꾸지 못하고, 무척 슬퍼했던 기억만 남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눈물이 촉촉했다. 엄청 영양가 없는, 허무한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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