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밤 11시

희선. 마누라. 사진을 스캔한 지 오래 되었다. 좀 게을러진 것이다. 혼자 사는 것에 지쳐가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나의 인생은 여러 개의 영화가 연결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로맨스 영화, 가족영화,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공포영화, 그리고 지금은 모르겠다. 희선이 암에 걸린 것을 알게 된 이후에, 그리고 희선이 죽고 난 후에는 그 전에 내가 살았던 삶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다. 아이들도 엄마하고 어디에 갔었는가에 대한 기억을 물어보면 기억이 안난다고 한다. 아이들의 인생과 나의 인생은 희선이 병든 시점에서 칼로 자르듯이 허리가 잘려나간 것 같다.
희선이 그렇게 처참하게 무너지고, 무의미한 고통을 받다가 결국에는 유언도 못남기고 죽어간 모습을 보았다 . 고통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것은 살아있는 인간들이 주로 타인의 고통을 보면서 하는 놀이다. 나는 희선의 고통에서 어떤 의미를 찾기에는 그 고통에 너무 가까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나조차도 그 고통을 같이 할 수는 없었다.
신이 있다면, 아니면 신과는 상관없이 어떤 깨달음을 얻기 위해 내가 이런 인생을 선택했다면, 도대체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 것인가? 무의미한 고통, 부재, 남은 인간의 외로움. 결국 내가 끌어낼 수 있는 깨달음은 하나 밖에 없다. 인생이 허상이라는 것. 내가 디디고 있는 땅이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다는 것. 나의 존재도, 희선의 존재 만큼이나 위태롭고, 언제든지 희선처럼 나도 죽을 수 있다는 것. 무의미하고 고통스럽게 죽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을 배우려고 했던 것인가? 내가.
인생에 침을 뱉어주고, 문을 닫고 인생에서 나가버리고 싶어하는 나의 성향에, 희선의 부당한 죽음은 마치 화약고에 불을 붙인 것과 같았는데, 자식이 있기 때문에 무의미한 인생에서 탈출하지 못하게 된 운명이라는 것. 이건 아이러니다.
강렬한 증오를 느끼는데, 그 증오를 퍼부을 대상이 누군지도 모른다는 것. 어쩌면 내가 바로 그 대상일지도 모른다는 것.
가슴이 자주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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