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선이 간 곳
1992.8.5
희선이 암에 걸렸을 때 내가 두려워한 것은 두 가지였다. 희선의 죽음에 대한 공포, 그리고 혼자 남게 될 나의 인생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두번째에 대해서는 그저 익숙해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첫번째에 대한 가장 큰 원인은 내가 죽음 이후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희선이 가기 며칠전 우연히 가사체험(near-death experience)에 대한 내용을 인터넷에서 보았다. 150 명 이상의 경험자를 대상으로 한 인터뷰에 기초한 내용이었다.
의학적으로 죽었다고 의사가 판단을 내리는 순간 그 사람들은 몸에서 빠져나오는 경험을 했다. 천장에 떠서 자신의 몸을 보고, 주변의 의료진, 가족들이 하는 말을 다 들을 수 있다.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거나 만지려고 하지만 불가능하다. 잠시후 검은 터널을 통과하고 밝은 빛을 본다.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너무나 환한 빛이다. 빛은 어떤 인격을 가진 것 같고 자신에게 부드럽게 말을 건다. 이때 그 사람은 형언할 수 없는 평온함과 행복을 느낀다. 잠시후 그 빛이 죽은 이에게 그의 인생 전체를 보여준다. 단순한 이미지가 아니라 생생한 3차원의 모습이고, 짧은 순간이지만 자신이 살았던 인생의 모든 순간을 생생하게 보여준다고 한다. 특히 다른 사람에게 친절했던 순간, 그렇지 못했던 순간을 보여주는데 이때 그 빛은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순간도 배움의 일부라고 말한다고 한다. 과거를 보고 나면 어떤 경계선에 도달하게 되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광활한 풀밭, 어떤 사람에게는 강, 어떤 사람에게는 손잡이가 없는 문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이 단계에서 이미 세상을 떠난 가족들이 건너편에서 행복하면서 광채를 띤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다. 가사체험을 한 사람들은 모두 여기서 이미 죽은 가족이나 알지 못하는 힘에 의해서 다시 원래의 몸으로 돌려보내진다고 한다.
가사체험에 대한 연구는 1960년에 시작되었는데, 이제는 연구가 많이 진척되어서 발견된 사례도 늘어났다. 미국에서 이루어진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800만명에 이르는 사람이 위에서 말한 내용과 상당부분 일치하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가사체험의 내용과 경험자의 학력, 문화적 배경, 인종, 종교는 상관관계가 없다고 한다. 거의 모든 사람이 개인차와 상관없이 유사한 경험을 한다는 것이다.
희선이 숨을 거둔 순간에 나는 희선의 몸을 보고 있었지만, 희선이 들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마음속으로 말했다. “여보, 그동안 고생했다. 좋은 데 가서 행복하게 살아.”
가사체험을 한 사람들은 경계선을 건너지 않고 돌아왔지만 희선은 그것을 넘어갔을 것이다. 죽음 직후에 아무도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하고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 때문에 불안해하지만 잠시 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형언할 수 없는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가사체험을 한 직후에 다시 소생된 사람들 중에는 의사에게 화를 내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자신을 왜 다시 살려내서 더 좋은 세상에서 고통스런 이 세상으로 끌어내렸냐고.
희선도 잠시 혼란스러웠겠지만 내가 보낸 마지막 인사를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한결같은 편안함과 낙천주의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빛과 아름다운 세상, 그리고 건너편에서 자신을 밝은 미소로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와 가족들에게 갔을 것이다.
가사체험에 대한 책을 몇 권 더 주문해서 읽고 있다. 가사체험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경험을 했다면, 희선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미친 짓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희선이 병든 몸에 더 이상 갇혀있지 않고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면 나의 슬픔은 많이 줄어든다.
혼자 남게 되었다는 괴로움에 대해서는 이런 식의 위안이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두 가지 문제 중에 하나는 가벼워졌다는 것에 대해 나는 마음이 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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